[정보] 알록달록한 세상을 모르는 사람들 (feat. 더 글로리)_색약, 색맹, 색각이상
더 글로리
아내와 소파에 반쯤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잘 나간다는 드라마는 거의 다 섭렵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더 글로리" 파트 1을 재밌게 보았다.
더 글로리 파트 1을 관통하며 계속해서 나오는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 단서는 여러모로 불리한 주인공에게 전세를 주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악역에게는 큰 약점이 된다.
악역의 악행을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유전적 증상의 발현.
바로 색약이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한 시청자들에게 굉장히 통쾌한 순간이 있다.
과거에 모든 악행이 일어났던 장소인 강당에서 모순적이게도 박연진은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상을 받는다.
하지만 같은 자리, 같은 멤버로 다시 만난 문동은은 처절한 복수의 시작을 알린다.
전재준은 달라진 문동은을 얕잡아보며 "알록달록해졌다"라고 비꼰다.
우리의 문동은은 지지 않고 전재준에게 말한다.
근데 재준아. 넌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크으으...
작가는 시청자가 어떤 상황에서 전율을 느끼는지 잘 아는 것 같다.
실로 통쾌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대사로 받아치는 동은이가 너무 멋져 보였다.
그런데 색약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많다.
색각이상 (색약, 색맹)
드라마에서 다루는 선천적 색각이상에는 청색각이상과 적녹색각이상이 있다.
청색에 민감한 시색소는 상염색체 7번, 녹색과 적색에 민감한 시색소는 성염색체 X에 유전자가 코딩되어 있다.
상염색체로 유전되는 청색각이상은 복잡한 유전경로를 갖게 되고, 이런 까닭에 드라마에서 쓰일 수 없다.
하지만 성염색체로 유전되는 적녹색각이상은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우는 내용이며 명확한 유전경로를 알아낼 수 있다.
극 중 전재준이 어떤 종류의 색각이상인지 수 차례 암시하는 내용이 있다.
전재준이 사용하는 빨간색의 색약렌즈(크로마젠렌즈)라던가 빨간 머리의 여자를 혐오하는 장면, 예솔이가 신호등의 색을 인지하지 못하는 장면, 구두의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장면 등에서 지속적으로 적록색약임을 어필한다.
극 중 박연진, 하도영의 색각이상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하예솔이 전재준의 친자일 확률이 99.9999%이므로 편의상 하도영은 색각이상이 아닌 것으로 가정한다.
박연진이 하예솔을 낳은 것은 사실이므로 보인자 또는 적록색각이상일 것이다. 어느 것이던 상관없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이 표시할 수 있다.
하예솔은 X'X'이므로 한 개의 X'는 박연진에게서 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한 개의 X'는 반드시 하도영에게서 와야 한다.
하지만 하도영은 X밖에 없다.
성립되지 않는다.
박연진의 X'와 전재준의 X'가 만나 하예솔의 X'X'가 만들어졌다.
이제 말이 된다.
편안하다.
알록달록한 세상을 모르는 삶
나는 적록색약으로 일생을 살아왔고 평생을 그렇게 살 예정이다.
극에서 전재준이 착용하는 크로마젠 렌즈는 나도 있다.
가격은 90만원 안팎으로 기억하고, 특이하게도 한 쪽 눈만 착용한다.
다른 소프트렌즈와는 다르게 두꺼워서 뒤집히거나 접히지 않는다.
실제로 이 렌즈를 끼면 한쪽눈은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일뿐만 아니라 적색은 특별하게 느껴질정도로 강조된다.
적색을 인식하는 시색소의 부족을 보상하고자 적색을 강조하는 역할로 느껴진다.
렌즈가 익숙치 않아서 불편할 뿐만 아니라 굳이 착용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같은 경도의 색약이 이 렌즈가 있는 까닭은 색약검사 패스가 목적이었다.
이 렌즈를 착용하고 어느정도 색약책자를 읽는 연습을 하면 정상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험상 패스확률은 70%정도였던것같다.
극 중 전재준처럼 이 렌즈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하다면 정도가 심한 적록색약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다행히 나는 정밀진단 결과 경도(약도)의 녹색약으로 진단받았다.
생활하고 밥 벌어먹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입학/채용에서 페널티가 있었고, 정도가 심하지 않다는 진단서는 항상 필요했다.
정도가 심하지 않은 까닭에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살면서 느낀 불편하고 불쾌한 경험을 꼽자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색을 구분하지 못해서 무안하고 진땀 빼는 일들이 의외로 제법 있다.
대충 생각나는 것을 몇 개 적어본다.
책자를 통한 색약검사에서 나만 읽을 수 없는 페이지가 있다. 못 읽으면 계속해서 물어보는데 참 난처하다.
신호등처럼 밝은 빛의 색깔은 정상적으로 인식하고 구분할 수 있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구분이 어렵다.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든 숲은 그저 감흥 없는 밋밋한 숲에 불과하다.
이미 평생 동안 겪어왔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
생각보다 흔한 증상이라 주변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알록달록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세상이 온통 흑백은 아니다.
단지 특정 환경에서 특정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도이고, 그저 조금 불편한 정도랄까.
마치며...
오직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저 추측할 뿐이다.
그러한 추측은 이 시대에 몹시도 중요하게 여겨진다.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 자체가 삶의 목표인 시대에 살고 있다.
확실히 색각이상자는 조금 다르게 볼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의 세상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알록달록할 것이다.
재미있는 드라마에서 익숙한 소재가 나오니 너무나도 흥미롭다.
치밀한 복수극이 어떤 알록달록한 이야기를 보여줄지 벌써 기대가 된다.
이렇게 두서없는 글을 대충 마친다.